
고등학교 때 제주도 서귀포경기장을 처음 밟았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천연잔디 피치(pitch)를 직접 밟는 순간 흙이나 인조잔디와는 차원이 다른 감촉에 잠깐 멍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축구 경기장이란 단순한 시설이 아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 생각이 세계 최대 축구 경기장들을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알면 알수록 그 규모와 기술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용 인원으로 본 세계 5대 축구 경기장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 경기장 하면 흔히 유럽의 대형 구장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당연히 캄프 누나 웸블리 스타디움 같은 이름이 1위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알아보니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세계 1위는 북한 평양에 있는 릉라도 5월 1일 경기장입니다.
공식 수용 인원(official seating capacity)은 15만 명으로 발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수용 인원이란 경기장이 안전하게 관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 좌석 수를 의미하며, 단순히 바닥 면적으로만 산정되는 수치가 아닙니다. 다만 이 15만 명이라는 숫자에는 이견이 있고, 독립적인 추산으로는 약 11만 4천 명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세계 최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계 상위 5개 축구 경기장의 수용 인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위 릉라도 5월 1일 경기장(북한): 공식 15만 명(실제 추산 약 11만 4천 명)
- 2위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MCG(호주): 100,024명
- 3위 캄프 누(스페인): 99,354명(재건축 완료 후 약 105,000명 예정)
- 4위 로즈볼(미국): 95,542명
- 5위 FNB 스타디움(남아프리카 공화국): 94,736명
재건축이 한창인 캄프 누는 2026년 말 또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며, 완료 후에는 약 10만 5천 명을 수용하는 유럽 최대 규모의 축구 전용 구장이 될 예정입니다. 총 건설 비용은 17억 3천만 유로로 알려져 있고, 최근 재개발에만 6억 유로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가는 이유는 단순히 좌석 수를 늘리는 것을 넘어, VIP 스위트룸, 첨단 조명 시스템, 팬 경험(fan experience) 향상을 위한 디지털 인프라까지 구축하기 때문입니다.
릉라도 5월 1일 경기장은 1989년에 건설되었는데, 당시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는 점이 역사적으로 눈길을 끕니다. 16개의 아치가 목련꽃 모양을 이루는 캔틸레버 루프(cantilever roof) 구조가 외관의 핵심입니다. 캔틸레버 루프란 기둥 없이 한쪽 끝만 고정되어 넓게 뻗어나가는 지붕 구조를 말하며, 관중석 어디서든 기둥에 가리지 않고 경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설계 방식입니다. 이 구조 덕분에 시각적으로도 압도적인 인상을 주지만, 그 안의 관람 편의성이나 현대적 시설 수준은 외부에서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은 솔직히 아쉬움이 남습니다(출처: FIFA 공식 홈페이지).
경기장 현대화와 우리나라가 놓친 것들
세계 유수의 클럽들은 지금 경기장 현대화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사례는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였습니다. 경기가 없는 날, 잔디 피치 전체가 지하로 내려가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일조량과 수분 공급을 최적으로 관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피치(hybrid pitch) 관리 시스템으로, 천연잔디와 인조잔디 섬유를 혼합하여 내구성을 높이면서도 천연잔디 특유의 감촉을 유지하는 기술입니다. 데이터 기반으로 잔디 상태를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것을 보고, 경기장 관리가 이미 첨단 스포츠 과학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우리나라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준비하며 전국에 대형 경기장들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서귀포경기장도 그 중 하나였고, 당시엔 정말 웅장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 상황은 다릅니다. 월드컵 이후 일부 경기장은 지역 K리그 클럽의 홈구장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리그 평균 관중 수가 구장 수용 인원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FIFA가 공인하는 공식 경기장 기준인 FIFA 스타디움 기준(FIFA Stadium Standards)에 따르면, 월드컵 개최 경기장은 좌석 수뿐 아니라 피치 품질, 조명 조도(럭스 기준), VIP 시설, 미디어 부스 등 수십 개 항목을 충족해야 합니다. 여기서 조도란 빛의 밝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TV 중계 화질과 선수들의 시야 확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입니다. 서귀포경기장도 처음 지어질 때는 이 기준을 충족했겠지만, 이후 지속적인 유지 보수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잔디 상태 등에서 아쉬움이 생겼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큰 경기장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경기장의 진짜 가치는 꾸준한 관리와 활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세계 축구 경기장들이 대형화·현대화에 투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경기만으로는 건설 비용을 회수하기 어렵기 때문에, BTS가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열어 12만 명 관중을 끌어모은 사례처럼, 축구 경기장은 이제 복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경기일 외 수익을 창출하는 이른바 논-매치데이 레버뉴(non-matchday revenue) 전략인데, 이는 경기가 없는 날 콘서트, 기업 행사, 투어 운영 등을 통해 경기장 운영 수익을 다각화하는 방식입니다. 국내 클럽들도 이 전략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출처: UEFA 공식 홈페이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세계 최대 경기장인 릉라도 5월 1일 경기장에서 남북한이 맞붙는 경기를 11만 명 이상의 관중과 함께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 함성의 크기는 상상만 해도 압도적입니다.
경기장은 결국 그 안에 사람이 가득 찼을 때 비로소 의미가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최대 수용 인원이라는 숫자보다, 그 공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경험을 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척도가 아닐까요. 국내 구단들도 규모에 걸맞은 팬 기반을 키워가며, 현대화 시설을 갖춘 축구 전용 구장에서 꽉 찬 관중과 함께 경기를 즐기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참고: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 경기장은 어디일까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 경기를 선보이기 위해 건설된 엄청나게 큰 경기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기사에 소개된 경기장들은 축구 경기를 위해 특별히 건설된 곳들입니다. 다른 스포츠 경기에도 주로 사용되는 다목적 경기장은 제외됩니다(따라서 미국의 10만 7천 석 규모의 미시간 스타디움이나 중국의 9만 1천 석 규모의 베이징 국립 경기장 같은 곳은 목록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래 나열된 경기장들은 축구 팬들로 항상 가득 차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