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비기기만 해도 32강 진출이 확정되는 경기였고, 상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습니다. 저는 조금 여유롭게 경기를 켰습니다. 그런데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이 글은 그 경기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리고 앞으로 32강을 어떻게 봐야 할지 정리해 보려 합니다.
선발명단이 말해준 것들
경기 시작 전 홍명보 감독은 "파격적인 선발명단"을 예고했습니다. 명단을 확인한 순간, 저도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캡틴 손흥민이 빠졌고, 이재성도 선발에서 제외됐습니다. 감독의 설명은 "체력적인 부분을 고려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판단이 경기 내내 발목을 잡았습니다.
축구에서 전방 압박(High Pres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상대 진영 가까이에서부터 볼을 빼앗으려는 수비 전술로, 상대 골키퍼나 수비수가 볼을 잡는 순간부터 압박을 가해 플레이를 차단하는 방식입니다. 이 전방 압박을 가장 영리하게 수행하는 선수 중 한 명이 바로 손흥민입니다. 토트넘에서도 그는 원톱 위치에서 패스 각도를 막으며 전방 압박의 기점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손흥민 자리에 들어간 선수들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이재성이 빠진 자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팀의 압박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남아공 골키퍼 윌리엄스는 경기 내내 여유롭게 볼 줄 곳을 찾았습니다. 제가 전반전을 보면서 가장 황당했던 장면이 바로 그겁니다. 골키퍼가 손동작으로 선수들 위치를 지시하면서 롱킥 타이밍을 재는데, 우리 선수들은 그냥 걸어서 가고 있었습니다.
- 손흥민 선발 제외 → 전방 압박 기점 상실, 남아공 골키퍼에게 빌드업 시간 허용
- 이재성 선발 제외 → 중원 압박 강도 저하, 턴오버 이후 역습 대응 취약
- 오현규·황희찬 선발 → 압박 수행 능력 부족으로 선발 의도 구현 실패
전술실패, 예상된 걸 그냥 허용했다
경기를 보면서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이게 분석을 안 한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막지 못한 건가"였습니다. 남아공의 플랜은 단순했습니다. 한국이 올라오면 뒷공간으로 롱킥을 때린다. 골키퍼 윌리엄스가 킥 능력이 뛰어난 선수라는 건 이전 경기에서도 확인된 사실이었습니다.
카운터어택(Counter Attack)이라는 전술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카운터어택이란 상대가 공격을 위해 전진한 순간, 볼을 빼앗아 비어있는 공간으로 빠르게 역습하는 전술입니다. 전력 차가 클 때 약팀이 강팀을 상대로 즐겨 쓰는 방식입니다. 남아공이 택한 게 바로 이 카운터어택이었고,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 당했습니다.
실점 장면을 돌이켜보면 패턴이 너무 명확합니다. 우리가 공격을 위해 많은 선수를 올린 상태에서 턴오버(Turn Over)가 발생합니다. 턴오버란 공격 중 볼 소유권을 상대에게 빼앗기는 상황을 말합니다. 볼을 빼앗긴 그 순간, 여러 명이 그냥 멈춰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김민재 혼자 상대 공격수를 따라가고, 나머지는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이 반복됐습니다. 3대 2, 심지어 3대 1에 가까운 역습 상황을 몇 차례나 허용했는데, 그때마다 상대 공격수 마세쿠의 결정력 부족 덕분에 추가 실점을 면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1대 0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진짜로 들었습니다.
FIFA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이번 경기 한국의 볼 점유율은 남아공을 크게 앞섰습니다. 하지만 점유율이 높다고 경기를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출처: FIFA 공식 홈페이지). 상대가 내려앉은 상황에서 점유율은 의미가 없고, 공간을 만들어 침투하는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32강 진출, 그 이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 패배로 한국은 조 3위로 내려앉았습니다. 다행히 2026 북중미 월드컵은 48개국 체제로 확대되면서 각 조 3위 팀 중에서도 성적순으로 일부가 32강에 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경우의 수를 따져봤는데, 3위 팀 중 올라가는 자리가 충분해서 진출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32강에 올라간다고 해서 기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대회 확대 포맷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48개국 체제란 기존 32개국에서 16개국이 추가된 방식으로, 각 조의 3위 팀도 일부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어 약팀에게도 기회가 넓어진 구조입니다(출처: FIFA 2026 월드컵 공식 페이지). 우리가 2포트 시드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확대 덕분입니다. 그런데 그 넓어진 기회 속에서 남아공에게 지는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게 문제입니다.
후반 막판 장면도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1대 0으로 지고 있는데 쓰리백(3-Back)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쓰리백이란 수비 라인에 3명을 배치하는 포메이션으로, 공격적으로 활용하려면 양쪽 윙백이 적극적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기혁, 이한범, 박진섭은 끝까지 내려선 채였습니다. 상대가 완전히 내려앉은 상황에서 수비 자원 세 명이 그냥 서 있으면, 우리는 10명 상대로 사실상 5명으로 싸우는 셈입니다. 일본 대표팀이 같은 쓰리백 시스템에서 이토 히로키, 토미야스 같은 선수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며 공격을 돕는 방식과 비교하면 차이가 너무 선명하게 보입니다.
- 48개국 체제에서 3위 팀 8팀이 32강 진출 → 수학적 가능성은 존재
- 멕시코가 체코를 3대 0으로 꺾으며 우리 경쟁 상대를 제거해 줬지만, 우리는 패배로 그 혜택을 스스로 날렸음
- 32강 진출 여부와 무관하게, 이 경기력으로는 토너먼트 단계에서의 경쟁력에 의문이 생김
제가 정말 많은 국가대표 경기를 봐왔는데, 이번처럼 허탈했던 경기는 손에 꼽습니다. 오늘 경기의 문제는 단순히 한 경기에서 진 게 아닙니다. 선발명단 선택, 전방 압박 부재, 쓰리백 운용 방식, 후반 교체 타이밍까지 모든 게 맞물려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월드컵 전부터 우려됐던 것들이 결국 드러난 거라고 봅니다.
32강 진출 여부는 다른 조 결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진출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음 경기에서도 지금과 같은 준비 수준이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선수진은 분명히 좋습니다. 그 선수들이 제대로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게 지금 이 팀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